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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낙원’의 비극과 40달러짜리 희망… ‘연 2회’ 주사가 바꿀 지구촌 에이즈 지도[클릭, 글로벌 제...

등록 2026-11-08 오후 11: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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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태평양 피지, 성인 60명 중 1명 HIV 감염… 마약 밀매 경유지 전락에 국가비상사태
    美 FDA, 길리어드 ‘레나카파비르’ 복제약 파격적 잠정 승인… 120개 개도국에 공급
    연 2만8000달러 신약, 40달러로 공급 장벽 허물어… ‘예방의 사각지대’ 메울 게임체인저

[이데일리 유진희 기자] 푸른 산호초와 에메랄드빛 바다로 ‘남태평양의 지상낙원’이라 불리던 섬나라 피지가 전례 없는 감염병 공포에 휩싸였다. 인구 92만 명의 작은 나라에서 성인 60명 중 1명이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감염되며 국가비상사태까지 선포됐다.

절망적인 수치 뒤에는 국제 마약 밀매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중남미와 아시아에서 생산된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이 호주와 뉴질랜드로 향하는 길목에서 피지가 주요 경유지로 이용됐고, 섬 안으로 흘러든 마약은 주사기 공동 사용이라는 뇌관을 터뜨렸다. 성매매와 맞물린 마약 투약은 바이러스의 번식 속도를 걷잡을 수 없이 키웠다. 지난해 신규 확진자는 2016명으로, 2019년 대비 무려 16배나 폭증했다.

더 비극적인 지점은 미래 세대로의 전이다. 임산부 100명 중 2명이 바이러스를 품고 있고, 지난해 감염 상태로 태어난 아기 59명 중 18명은 첫 생일조차 맞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환자의 60% 이상은 자신이 감염된 사실조차 모르고, 실제 치료를 받는 비율은 20%를 겨우 넘는다. 낙원이라 불리던 고립된 섬은 바이러스가 통제 없이 번지는 잔인한 배양 접시가 됐다.

(사진=게티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


이처럼 보건 인프라가 취약한 개발도상국이 HIV의 늪에 빠져들 때,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는 이를 저지할 파격적인 ‘의약품 주권의 결단’이 내려졌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다국적 제약사 길리어드 사이언스의 혁신 HIV 예방 주사제인 ‘레나카파비르’(제품명 예즈투고)의 저가 제네릭(복제약)을 잠정 승인한 것이다. 신약의 특허가 엄연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규제 당국이 해외 공급용 복제약을 예외적으로 조기 승인한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든 이례적 조치다.

레나카파비르는 지난해 6월 백신에 준하는 획기적인 감염 차단 효과로 글로벌 제약바이오 업계를 뒤흔들었던 약물이다. 그러나 미국 내 출시 가격이 연간 약 2만 8000달러(약 3800만 원)에 달해, 정작 바이러스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된 개도국 환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이번 FDA의 결단과 글로벌 보건기구 유니트에이드, 클린턴 건강 접근성 이니셔티브(CHAI), 인도 제약사 닥터레디스 간의 3자 합의로 공급의 벽은 일거에 허물어졌다. 길리어드가 6개 복제약 제조사에 로열티 없는 라이선스를 제공하기로 통 큰 결단을 내리면서, 세계 120개 중저소득국가에 공급될 복제약의 가격은 연간 단 40달러(약 5만 5000원)로 책정됐다.

오리지널 신약 대비 700분의 1 수준으로 가격이 내려앉으며, 피지와 같은 저소득·취약 국가에서도 대규모 공중보건 예방 프로그램으로 도입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비로소 마련된 셈이다.

보건 전문가들이 40달러짜리 레나카파비르 복제약 공급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히 가격 때문만이 아니다. 바로 ‘연 2회 투여’라는 압도적인 투약 편의성에 있다.

그동안 에이즈 예방 요법(PrEP)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알약을 복용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위생 관념이 낮고 약물 오남용과 사회적 낙인이 만연한 취약 지역에서 ‘매일 복용’의 순응도를 유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피지처럼 주사기 재사용을 통한 마약 투약자나 성매매 종사자 등 초고위험군에게 알약 복약 지도는 겉돌 수밖에 없었다.

반면 피하주사 형태인 레나카파비르는 반년에 딱 한 번, 1년에 단 두 번만 투여받으면 체내에서 지속적으로 바이러스의 복제 침투를 차단한다. 복약 실패율을 제로(0)에 가깝게 낮출 수 있어 전염의 연결고리를 물리적으로 끊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지난해 세계에서 HIV에 감염된 환자는 4100만 명에 달하며, 한 해 동안 57만 명이 에이즈로 목숨을 잃었다. 바이러스는 국경을 가리지 않으며, 가장 취약한 고리에서 터져 나온 불길은 결국 글로벌 안보를 위협한다.

신약의 독점적 특허 수익 대신 공공재로서의 가치를 선택한 글로벌 빅파마의 양보와 규제 당국의 유연성, 그리고 혁신적인 제형 기술의 결합이 ‘성인 60명 중 1명 감염’이라는 피지의 참극을 멈춰 세울 수 있을지, 지구촌 보건의료계의 시선이 남태평양으로 쏠리고 있다.